멜론 홈페이지(테마 인터뷰)에서 긁어왔습니다.
글이 쫌 기네요~^^


드렁큰 타이거는 멀리서 우리에게 왔다. 이들은 힙합의 즐거움과 뜨거움, 그리고 경쾌함과 둔중함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했다. 이들은 상처 입은 한국의 호랑이이다. 하지만 바로 그 상처로부터 이들의 힙합은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DJ shine이 빠지고 난 뒤 혼자가 된 JK 서정권은 드렁큰 타이거의 여섯 번째 외침을 만들었고 예순 번째를 맞는 광복절 직전에  발표했다. 그리고 여의도의 커다란 빌딩에서 스케줄로 피폐한 그를 만났다...

(새로운 앨범이 나왔다. 정규 앨범으로 여섯 번째이다. 뮤지션의 생명이 점점 단축되고 있고, 음반시장마저 붕괴한 최악의 상황에서 래퍼가 여섯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드렁큰 타이거의 경우 데뷔 앨범부터 만만치 않은 음반 판매고를 올려왔고, 한국 음반 산업이 최악의 빈사상태에 허덕인 2004년에 발표한 5집도 그전의 앨범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십만장 선을 지켰다고 알고 있다. 이번 앨범을 발표하며 감회가 새로웠을 텐데?)

일 년 내내 공연만 하고 싶다. 5집 때도 4집 때도 똑 같이, 그저 구멍가게 장사하듯이 한다.

정치적으로나 사생활적으로나 해방되고 싶어서...

(앨범 타이틀은 ‘1945 해방’이라는 다소 의외의, 강한 주제이다. 올해가 광복 60주년, 중요하다면 중요한 해인데, 관에서 하는 의례적인 행사 말고는 젊은 세대에겐 그리 어필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 앨범 타이틀을 설정한 의미는?)   사실 알고 나면 너무 시시한데... 아프리카의 흑인하고는 달리 미국 흑인(African American)들한테 그들이 노예로 끌려온 1555년이 상징적인 뿌리에 해당하는 중요한 숫자이듯이, 우리에게도 1945는 중요한 번호이다. 물론 게임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은 이 숫자에서 오락게임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할머니가 과일 깎아주며 얘기 들려주듯이 그렇게 이번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아버지와 형제분들은 어릴 때 일본 경찰이 지나갈 때마다 진흙을 할머니 얼굴에 발랐다고 한다. 혹시라도 끌려가서 험한 꼴 당할까봐... 말콤 엑스처럼 주먹 쥐고 항거할 순 없지만... 나는 생각보다 촌스런 사람이다. 정치적으로나 사생활적으로나 해방되고 싶어서... 1945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시시하지?

(드렁큰 타이거의 사운드는 미묘한 오리엔탈리즘이 있다. 지난 세기말의 데뷔 앨범에서도 영어의 랩 밑으로 흐르는 동양적 선율감과 해금을 고용한 세 번째 앨범, 그리고 지난 다섯 번째 앨범에선 70년대 초반의 송창식의 노래를 샘플링하는가 하면 판소리적 플로우를 구사하기도 했고, 이슬람풍의 프레이즈를 결합하기도 했다. 다른 여느 한국의 뮤지션들이 일회성으로 시도해보는 작업들을 드렁큰타이거는 지속적으로 접근해 온 셈인데, 당신이 생각하는 음악과 삶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얘기해 달라.) 예민할 때이다... 어떻게 말해도 매국노가 될 수밖에 없는 교포의 신분에선... 돌아가라, 군대 가라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미국에서 살다보면 눈에 보이는 굉장히 직선적인 인종차별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오싹한 인종차별을 동시에 겪는다. 요새는 다들 영리해가지고(사실은 법적인 불이익을 당할까봐서이지만)눈에 보이는 차별은 거의 하지 않는다. 식당에 들어가면 아주 자연스럽게 구석자리로 몬다거나 그런 식으로. 제일 심한 욕은 코리언, 동양놈, 너희 나라로 가라 이런 식인데 나 개인에 대해서라기보다는 피부색과 민족을 비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늘 존재하는 피해의식을 넘어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팝 분야와는 달리 힙합에서는 꽃미남이 아니어도 된다. 아이돌이 아니라 어, 나랑 똑같네? 나도 열심히 하면... 이런 반응을 이끌어내면 된다. 그래서 더 우리의 색깔을, 혹은 튀는 방법을 연구해야만 했다. 동양인이 에릭 비 앤 라킴이나 제이제이처럼 해봐야 꽝이다. 의도적으로 국악을 도입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배어난 것뿐이다.

이중의 인종차별

(많은 교포 혹은 이민자 후예 출신의 뮤지션들이 공통으로 겪고 또 극복해야 할 문제이겠지만 당신은 당신의 조국으로 다시 돌아오면서도 언어부터 시작하여 많은 장벽을 넘어야 했을 것이다.)   싸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거개의 사람들에게 드렁큰 타이거는 외국물 먹고 좀 껄렁거리다가 잘 나가는 회사 만나서 손쉽게 터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몇 년 동안 거리에서 고생했던 단계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여기 와서도 텃세는 미국만큼이나 심했고 우리가 설 무대는 없었다. 그래서 더 공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부러 난장판을 만들면서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고 굉장히 거만하게 굴었던 것이다. 물론 부작용도 많았다. 사실 발악이었다. 힙합이 아닌 음악들이 힙합이라고 휩쓰는 판에 끼어들 틈도 없어서... 그때 1995년 나중에 드렁큰 타이거 1집의 원형이 되는 앨범을 만들었는데(타이거 JK 라는 이름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난다. 같이 온 흑인 멤버 수크램은 미국에서도 인정받은 프로페셔널이었다. 그는 태권도를 통해 한국을 알았고 사부를 통해 동방예의지국의 예까지 배운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그가 사랑한 한국에게 미국에서 받던 차별을 받고는 돌아가야 했다. 검둥이라서 방송 안 된다는 PD의 말, 이해가 간신히 되긴 했지만 충격이 컸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다 때려치우고 도로 돌아가자. 가서 태권도나 가르치고 그러자.

(드렁큰타이거의 랩에는 무언가를 치열하게 공격하는 순간에도 슬픔의 정조가 배어 있다, 고 나는 느낀다. 그것이 타인에 대한 동정이건 자기에 대한 연민이건 삶에 대한 허무함이건 간에. 어쩌면 이와 같은 감성적인 요소 때문에 본격 힙합이 범 대중적으로 파고들기 쉽지 않았던 때에도 당신의 음악이 무의식적으로 대중의 마음에 연착륙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신의 인생에서의 슬픔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겠는가?) 책을 쓸 정도로 많지만 나보다 더 안 좋은 사람도 많으니 조심하게 된다. 사실 요즘 말하기가 무섭다. 칭찬보다는 욕밖에 들리지가 않는가하면, 어쩌다 날 칭찬하는 말은 날 비꼬는 거짓말로 들린다. 4집 때까지 내가 그렇게 유명한 건지도 몰랐다. 동네 시장에 장보러 가면 날 알아보는 아주머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은 뜨거운 분이셨지만 돈에 대해서만은 깜깜절벽인 아버지가 몇 차례의 사기를 당하며 곤경에 빠지고 빌보드 특파원 구실로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아버지... 누구보다도 가족에 대한 애착이 컸던 당신은 초등학생인 어린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러다 아버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마이애미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시는 터프한 삼촌이 나를 강한 남자로 키우라는 조언에 졸지에 나만 미국에 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겐 충격이었다. 자라면서 너무 심한 것을 보았다. 친구의 죽음. 십년동안 감옥에 갇힌 또 다른 친구... 가족이 흩어지면서 힘든 삶이 계속되었다. 조금 커서는 동생들까지 책임지게 되자 알바로는 끼니도 떼우기 어려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바닥에 정말 나쁜 사람들이 많더라. 아빠가 당한 것처럼 사기도 많이 당했고, 목에 힘들어간 사람들도 너무 많고, 방송은 너 키워준다고 온갖 생색내고, 조금 뜬 가수와 무명인 가수 사이의 갭도 너무 크고... 마치 동물의 왕국에 온 것 같았다.

슬리퍼만 신고 있어도 나는 힙합이다

(그리고 당신은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작은 파문을 일으켰고 곱지 않은 시선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과 당신의 음악은 그 파동으로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힙합은 미국의 웨스트코스트와 이스트코스트의 험악한 대립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적대나 화해에 있어서도 대단히 공동체적이다. 당신의 이번 앨범에도 T를 비롯하여 수많은 동료들이 즐거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의 힙합 음악에서 당신이 높이 평가하는 뮤지션이 있다면?)   팬이나 안티들이 모르는 사실 중의 하나는 내가 한국 힙합의 열렬한 팬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힙합이라면 다 들어보고 산다. 어떤 뮤지션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래도 굳이 꼽으라면 MP 시절부터 알아온 가리온이다. 이 사람들의 고집이 좋다. 그래서 역사가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t는 말할 것도 없고, 데프콘도 재미있는 친구이며, 6집에 곡을 받으려 했으나 사정상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데피 역시 주목한다. 우리나라의 힙합하는 사람들은 다 천재다. 곡도 만들고 랩도 해야 하고 프로듀싱까지 한다. 나만 해도 곡을 만들게 된 이유가 곡을 살 돈이 없어서였다.커티스 메이필드, 밥 말리에서 비틀스까지 아버지 때문에 옛날 음악을 많이 접했다. 물론 국내의 펄 시스터스나 신중현, 김수철의 음악들 다 좋다.

(‘한류’가 어떻다, ‘아시아적 가치’가 어떻다, ‘동북아시아 문화블록’이 어떻다 말도 많지만 당신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해방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음악문화는 힘든 터널을 막 지나서 새로운 도약의 힘든 고비를 통과하고 있다. 당신이 바라는 음악문화 환경이 있다면?) 우리한테 갇혀서 우리만 잘났다 하는 것보다, 우리가 최고야 하는 긍지 말고, 우리나라 최고야 하는 이런 세뇌 말고 - 우린 그런 프로퍼갠더가 많은데 - 오픈해서 문화적인 차원에서 밀어주고 투자하는 분위기가 빨리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최고가 될 수 있는 자원이 많다고 생각한다. 다만 투자가 없어서 빛을 보지 못할 뿐이지. 그리고 시기보다 축하해 줄 수 있는 풍토가 빨리 되었으면 한다.  

글쓴이 강헌 -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연구소장

인터뷰어 : 강헌 / 인터뷰 한날 : 8월 24일 저녁 / 인터뷰 참가자 : 한미영(진행), 김형덕(사진) / 인터뷰장소 : 여의도 국민일보 내 카페
Posted by 덕근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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